세밀한 그림에 담긴 사색적 세계
1971년 「목쉰 방(?れた部屋)」으로 데뷔한 다니구치 지로(谷口ジロ?)는 청년을 대상으로 한 모험물, 격투물, 하드보일드 활극, 문예, 에스에프(SF)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지만 망가(漫畵)로 불리는 일본 만화와는 조금 다른 길을 걸어왔다. 1970년대 중반에 처음 방드 데시네(bande dessinee, 프랑스 만화)를 접한 지로는, 장기간에 걸친 치밀하고 완성도 높은 그림에 함축적인 메시지와 작가의 철학을 녹여내는 방드 데시네에 매력을 느꼈다. 그 후 방드 데시네를 자신의 작품세계에 접목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를 거듭하다 결실을 맺은 작품이 『산책(?く人)』(1991)이었다. 일본 연재 당시보다 프랑스에서 더욱 큰 호응을 받았던 『산책』은 교외의 주택가에서 아내와 개와 함께 사는 한 남자가 주변을 산책하는 정경을 담담히 그려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세밀하게 표현해낸 골목골목의 모습에 자주 눈길이 멈추게 하고, 대사 한마디 없이도 생각이 꼬리를 물며 자연스럽게 사색으로 이끈다. 또한 기르는 개와 함께 한가롭게 동네 산책을 하거나, 우연히 마주친 노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결국 같이 길을 걷거나, 퇴근길에 발견한 실외 수영장에 몰래 들어가 수영을 하는 등의 소소한 일상은 슬며시 웃음짓게 한다.
‘루브르 만화 컬렉션’의 열번째 이야기 『천 년의 날개, 백 년의 꿈(千年の翼, 百年の夢)』(2014)에서도 다니구치 지로 특유의 치밀하고 섬세한 그림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그는 특히 배경에 많은 힘을 기울이는데, 『에도 산책(ふらり)』(2011)을 그릴 당시 한 인터뷰에서 “배경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배경 역시 캐릭터의 하나로 그려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천 년의 날개, 백 년의 꿈』의 주인공이 맨 처음 보고 싶어한 그림이 코로(J. B. C. Corot)의 풍경화였던 것도 ‘배경은 캐릭터의 하나’라는 작가의 생각과 맥락이 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을 작업할 때도 작가는 한 달 동안 파리에 거주하며 매일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다 빈치의 〈모나리자〉, 코로의 〈모르트퐁텐의 추억〉,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등 거장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루브르 박물관의 외관부터 드농관, 쉴리관, 대회랑, 프랑스 회화 전시실, 나폴레옹 홀 등 루브르 구석구석을 마치 사진으로 찍어 놓은 듯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제이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을 피해 루브르의 미술품을 옮기는 소개 작전을 펼치던 상황은 마치 영상 기록물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게다가 안토니오 폰타네시(Antonio Fontanesi),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Charles Francois Daubigny),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등 역사적 인물들을 등장시켜 사실적 배경 묘사에 생동감을 더욱 불어넣고 있으며, 나카하라 추야(中原中也)의 시(詩)나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코로에 대한 비평 등을 인용하며 이야기를 풍부하게 끌고 나간다.
루브르에서 도쿄로 타임 슬립
『천 년의 날개, 백 년의 꿈』의 주인공은 파리를 처음 방문한 이방인이다.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국제 만화 페스티벌을 마친 주인공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파리의 미술관들을 구경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독이 풀리지 않아 호텔에서 며칠을 앓게 되고, 몸을 추스르고 겨우 찾아간 루브르 박물관에서 다시 쓰러지고 만다. 그리고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자신을 ‘루브르의 수호자’라고 밝힌 정령 ‘사모트라케의 니케’의 안내를 받으며 닷새에 걸쳐 다른 시공간의 루브르를 보게 된다. 어떤 날은 메이지 시대의 서양화가 아사이 주(?井忠)와 함께 1900년의 루브르에서 코로의 풍경화를 감상하고, 어느 날은 1908년 도쿄에서 열린 아사이 주의 유작전을 관람하며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나쓰메 소세키를 목격하기도 한다. 그러다 1931년의 루브르에서 작가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를 만나 1930년대 일본의 빈약한 문화 환경에 대한 한탄을 듣기도 한다. 또 어느 날은 고흐가 생을 마감한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만년의 고흐를 만나 그의 작업실과 그림들을 직접 보는 행운을 누린다.
재미있게도 주인공이 만난 인물들은 대개 어떤 형태로든 프랑스와 일본을 잇고 있다. 파리에서 유학생활을 한 화가 아사이 주는 귀국 후 서양화 연구소를 세우고 후진 양성에 힘쓰며 일본 서양미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고흐가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와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重)를 비롯한 일본 우키요에(浮世?) 화가들의 작품을 열성적으로 수집했으며 기법을 받아들이고 모사하기를 즐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에서 거의 최초로 프랑스 만화를 받아들인 만화가인 다니구치 지로가 지난 시간 동안 프랑스와 일본 미술이 서로 주고받은 내력과 루브르 박물관을 거쳐 간 자국의 선인들을 생각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동하는 타임 슬립(Time Slip)은 다니구치 지로가 즐겨 사용하는 기법이다. 2002년 프랑스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각본상을 받은 『열네 살(?かな町へ)』은 중년의 남자가 열네 살로 돌아가 생기는 일들을 담고 있으며, 소세키의 소설 『산시로』를 오마주한 단편 「달밤」 역시 길을 헤매다 다른 공간으로 떨어진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천 년의 날개, 백 년의 꿈』의 주인공도 다양한 시간대의 루브르와 도쿄를 넘나들며 다른 시공간을 체험한다. 그는 매일 눈뜰 때마다 미궁에 빠진 것 같은 혼돈을 느끼지만, 그러면서 마주하게 된 과거는 이전에는 몰랐던 진실에 이르게 한다. 주인공이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방문한 루브르에서 그가 가장 그리워했던 아내를 만나게 된다. 그는 2011년 일본 도후쿠 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 때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던 것이다. 그녀는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 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현재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을 전하고는 사라진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게 되는 일상의 행복을 온힘을 다해 끌어안고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루브르의 작품들에 기나긴 역사가 담겨 있듯이, 아주 사소한 일, 조그마한 물건 하나에도 삶의 순간이 있으며 이야기가 있다. 작가는 오늘도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 지금 이 순간 여기 있다는 사실이 주는 삶의 무한한 긍정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