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덕주, 조선의 유일한 여성 실학자 빙허각을 만나다
온 세상을 책에 담은 두 여성의 이야기
제26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을 수상한 채은하가 신작 『이웃집 빙허각』을 출간했다. 가난한 양반의 딸 ‘덕주’가 훗날 조선에서 유일한 여성 실학자로 불리는 ‘빙허각’과 함께 최초의 한글 실용 백과사전 『규합총서』를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를 그린 역사동화다. 빙허각을 통해 여인이 글을 쓰고 공부하는 모습을 처음 본 덕주가 남몰래 간직했던 자신의 꿈을 키워 나가는 이야기가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결국 답을 찾아내는 덕주와 빙허각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각별한 용기를 전한다.
“규합에 어찌 인재가 없으리오.”
조선 후기 여성들의 삶을 ‘지금, 여기’로 불러오다
제26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 수상작 『루호』로 우리 옛이야기를 생동감 넘치고 흥미진진한 서사로 불러왔다는 평을 받은 채은하가 역사동화 『이웃집 빙허각』을 펴냈다. 눈에 불을 담은 소녀 ‘덕주’가 훗날 조선 유일의 여성 실학자로 불리는 ‘빙허각’과 함께 『규합총서』를 만드는 이야기를 섬세한 문장으로 담아냈다. 『규합총서』는 조선 시대 여성들에게 오랫동안 인기를 끌며 전해 내려온 최초의 한글 실용 백과사전이다.
조선을 기록의 나라라고 하지만 여성이 나오는 기록은 극히 적다. 작가는 여성이 기꺼이 자신을 낮추고 희생해야 했던 조선 후기 시대상에 주목하고, 이 시기를 주체적으로 살림과 생활을 이끌어 나가는 여성들이 스스로 지식을 찾아 나선 시대로 재해석한다. 『이웃집 빙허각』은 조선 후기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 주면서 역사를 유연하게 재현한다. 온갖 물건들로 가득한 빙허각의 안채를 눈에 보이듯 실감 나게 묘사하고, 조선 시대 여성들이 제각각 다른 삶을 꾸려 나가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그린다. 그 중심에서 『규합총서』는 등장인물들의 갈등을 봉합하는 가교가 되고,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꿈을 꿋꿋이 펼쳐 나가도록 돕는 계기가 된다. 새로운 시각으로 빙허각 이씨라는 역사 속 인물의 삶과 『규합총서』의 탄생 과정을 되살려 낸 작업이 뜻깊다.
“저는 계속 쓰고 배우고 싶어요.”
빙허각과 함께 꿈을 키우는 덕주의 성장기
주인공 덕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답답한 마음에 새벽녘 언덕을 헤매다가 빙허각을 만나고, 우연히 그 집에서 살림을 배우게 된다. 여인이 공부하고 글을 쓰는 모습을 처음 보고 혼란스러워하는 덕주에게 빙허각은 묻는다. “여인이 먹고사는 일에 관한 책을 쓴다면 어떨 것 같으냐?” 하지만 온종일 일하느라 한문을 익힐 시간이 없었던 덕주는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하는 책이라면서 왜 어려운 글자로 쓰나요?” 하고 반문한다. 책을 언문으로 쓸 것이냐, 한자로 쓸 것이냐 하는 문제로 치열하게 부딪치는 두 여성의 눈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기 뜻을 꿋꿋이 펼쳐 나가려는 불씨가 담겼다.
덕주의 아버지는 사대부의 도리를 중요시하고, 어머니는 온종일 일하느라 바빠서 덕주에게 무심한 듯 보인다. 그러나 글 쓰는 일을 들켰을 때, 어머니는 “네 마음대로 해라.” 하며 계속 써 나갈 힘을 실어 준다. 반면 아버지는 여인은 자신을 낮추고 없는 듯 살아야 한다며 격렬히 반대한다. 대체 왜 험한 길을 가려는지 묻는 아버지에게 덕주는 “저는 꺾이지 않을 거예요.” 하고 단단한 결심을 말한다. 틀을 깨는 빙허각의 모습과 주변 인물들의 사랑에 힘입어 덕주는 자신만의 책을 쓰겠다는 꿈을 다져 나간다. 『이웃집 빙허각』은 훗날 덕주가 쓴 언문소설이 큰 인기를 얻게 된 미래를 암시하며 결말을 맺는다. 넓은 세상을 유랑하며 간절히 바랐던 꿈을 펼쳐 나가는 덕주의 성장이 눈부시다. 각자의 꿈을 지혜롭고 용감하게 마주하는 덕주와 빙허각의 모습은 담대하게 자신의 마음을 지켜 나가는 현실의 우리를 북돋아 준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더없이 소중하다는 주제 의식이 많은 이의 마음을 밝혀 줄 것이다.
“저는 제 책을 꼭 쓸 것입니다.”
멀리까지 흘러 나가는 책의 힘
집 안팎의 일을 챙기느라 평생을 바쁘게 살아온 빙허각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런 빙허각에게 덕주는 왜 ‘평생 매여 있던 힘든 일’에 관한 책을 쓰느냐 묻는다.
“왜 쓰느냐. 그 답은 네가 한 말 속에 있겠구나. 내가 일평생 해 온 일이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일이니까. 설령 누군가는 고작 여인의 일이라 깎아내리고, 또 그 일이 거칠고 고되기만 해도, 그 속에는 내 경험과 삶이 들어 있으니까.” (151면)
빙허각의 대답은 잔잔한 파문이 되어 덕주의 마음을 아직 만나지 못한 세상 너머의 이야기로 가득 차오르게 한다.
“저는요. 이야기가 좋아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세상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꿈꾸게 돼요. 나도 중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마음을 설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152면)
덕주와 빙허각이 힘을 합쳐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는 둑을 터서 고인 물을 흐르게 하는 것과 같다. 별 볼 일 없다 여겼던 자신의 삶과 경험이 책에 담긴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마을 여인들의 얼굴은 뿌듯함으로 차오른다. 책이 완성되어 갈수록 마을 여인들의 비밀스러운 응원은 점차 힘찬 목소리로 변화한다. 『규합총서』는 훗날 많은 여인이 소중히 여겨, 손에서 손으로 필사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책을 통해 더욱 끈끈해지는 연대가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 눈부신 연대에 많은 독자가 동행하기를 바란다.
줄거리
매일 새벽, 일렁이는 마음을 안고 언덕에 올라 강 저편의 세상을 궁금해하던 덕주는 우연히 이웃집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할머니가 살림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는 것, 할머니에게 ‘빙허각’이라는 멋진 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인이 공부하고 글을 쓰는 모습을 처음 본 덕주는 남몰래 할머니가 책 쓰는 일을 돕겠다고 결심한다. 아버지는 여인은 오로지 자신을 낮추며 살아야 한다고 늘 말했다. 최초의 한글 실용 백과사전 『규합총서』를 완성해 갈수록 이야기를 좋아하고, 세상 밖이 궁금한 덕주의 고민은 커져만 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