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욘 포세 대표작 ㆍ 멜솜 문학상 수상작
“그의 혁신적인 희곡과 산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목소리를 부여한다.”
_노벨문학상 선정 이유
탄생의 아침과 죽음의 저녁
침묵과 리듬의 글쓰기로 포착한 전 생애의 디테일
나는 오랫동안 이런 이야기를 꿈꾸어왔다. 심각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위대한 인간이 등장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답고 눈부신 이야기를. _정여울(작가, 문학평론가)
바지런한 산파의 움직임, 산모의 고통어린 숨, 이제 곧 아버지가 되려는 남자의 기대와 걱정. 소설은 노르웨이 해안마을 어딘가, 한 살림집에서의 출산 장면으로 시작된다. 일이 잘못되어 아내나 아이나 아내와 아이 모두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찬 남자의 내적 독백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상념은 분명 그들을 도와 온갖 나쁜 일로부터 구원해줄 신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신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는 믿지 않는 남자에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아이가 할아버지처럼 요한네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미처 단어가 되지 못한 외마디 모음과 뒤섞인 아내의 비명이 길게 이어진 후 마침내 아이가 태어나면서 초조한 시간은 끝난다. 그렇게, 요한네스라는 이름의 아이가 태어났다.
장이 바뀌고 그사이 긴 시간이 흘러, 요한네스는 노인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가족을 이루고 너무 외진 곳이었던 고향을 떠나 새로운 이곳에 터전을 잡았고 고깃배를 타고 나가 생계를 꾸렸다. 아내도 친구도 곁을 떠난 지금, 적막하고 고독하기만 한 요한네스의 삶에서 근처에 사는 막내딸만이 의지처가 되어준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의 하루가 막 시작된 참이다. 썰렁한 집안에서 혼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빵을 먹는다. 별다른 기대가 없는 일상,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고 원래 그대로인데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듯하다. 늙은 몸도 무게가 거의 없는 듯이 가뿐하다. 눈에 들어오는 사물들, 풍경이 어쩐지 너무 달라 보인다. 요한네스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바라본다.
여하튼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확신할 수 없다, 달라진 것이 있어도, 그것은 아마 그의 내부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게 가장 그럴듯할 것이다, 아니면 혹시 밖으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을까? 저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을까, 대수로운 게 아니라도, 그에게 이런 느낌을 주는, 그저 뭔가 아주 사소하지만 모든 것을 완전히 달라 보이게 하는 그런 일이? 하지만 그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아닌가? (본문 49p)
그리고 여느 때처럼 서쪽 만灣으로 산책을 나간 길에, 페테르를 만난다. 같이 배를 탔고 오십 년 넘게 서로 머리를 잘라주기도 했던 절친한 친구, 그러나 지금은 세상에 없는 친구를. 여느 때처럼 위층 다락방에서 잠들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려오지 않았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던 아내가 집안의 불을 밝히고 기다리다 그를 위해 커피를 끓인다. 막내딸과 마주치지만 그가 보이지 않는 듯 지나가버린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지만 과거 어느 때와도 다른 이날, 도대체 요한네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모든 게 그저 그의 상상인가? 또 번호 없이 여백으로만 구분된 마지막 장에는 어떤 결말이 준비되어 있는가?
요한네스라는 아이가 세상에 나온다, 요한네스라는 늙은 어부가 생의 마지막날을 맞이하려 한다. 이 양끝 사이의 삶은 요한네스의 착각이나 환각, 그리고 조각난 기억들로 채워진다. 죽은 자들이 숨을 불어넣어 되살리는 그 기억은 요한네스가 지나온 삶에서 느끼지 못한 것들을 느끼게 만들고, 확신했던 일을 불확실하게 만든다. 이렇듯 이야기 속에서 삶과 죽음이, 물질적 현실계와 형이상적 세계가 자연스레 겹친다. 시간 또한 선적으로 흐르지 않아서 현재와 과거가, 과거와 미래가 스며들어 있다.
작품의 형식 또한 이를 구현해내고 있다. 이 작품에는 마침표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쉼표로 잠시 침묵한 뒤 다음 문장으로 미끄러지듯 넘어간다. “죽음과 삶의 과정이 결국 하나의 끝나지 않는 문장 속으로 들어”와 있다(정여울). 아이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주고 시간이 흐른 뒤 그 아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제 아이에게 물려주듯이, 삶과 죽음의 세계는 마치 문장의 사슬처럼 서로 이어지고, 겹치고, 스며든다.
이처럼 ‘저편으로 넘어가는’ 존재의 상태는 연구자 크뤼거가 욘 포세 인물들의 특징으로 설명한 ‘멜랑콜리커’와도 닿아 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요한네스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불안한 실존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한다. “멜랑콜리커는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고민하며, 사후세계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불안을 받아들인다.”
“언젠가는 사라져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래 여기 머물러라”
가장 단순한 언어로 만들어낸 가장 심오한 이야기
소설의 시작에서 아이의 탄생을 앞둔 아버지는 말한다. 거리의 악사가 훌륭한 연주를 할 때, 그의 신이 말하려는 바를 조금은 들을 수 있다고, 신이 거기 있다고. 하지만 사탄이 이를 좋아할 리 없으니, 정말 훌륭한 악사가 연주하려 하면, 늘 많은 잡음과 소음을 준비한다고. 이 책이 만들어내는 음악은 특별히 나직하고 고요할뿐더러 짧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도 비범한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고, 화려한 미사여구로 눈길을 끌지도 않는다. 무대 위에서 독백을 들려주는 배우처럼 주인공 내면의 목소리가 쉴새없이 울리는 데 비해 인물들끼리의 대화는 과묵하고 삭막하기 그지없다. 침묵으로 여백이 깃들고, ‘그래’ ‘아니’ ‘그리고’와 같은 단어가 반복되며 특별한 리듬이 만들어진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임을,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을 이야기하는 그 음악은 너무 아름답기에 사탄의 방해는 그저 헛되지 않은가. 욘 포세는 단순하고 간결한 언어로 심오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쉼표 너머의 침묵, 그 내밀한 뉘앙스를 채워가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