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간 분열, 내셔널리즘과 글로벌리즘,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이 첨예하게 맞부딪는 현대 세계의 축소판 홍콩
국내에서는 우산운동을 ‘민주’와 ‘자유’를 기치로 내건 저항 운동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과연 그것뿐일까? 실제로 홍콩에서는 당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젊은이들을 격렬한 시위운동으로 몰아넣은 것일까? ‘민주’와 ‘자유’라는 명분 이외에도 젊은이들이 그렇게 격렬하게 나선 진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두 저자는 2010년대 우산운동으로 촉발되어 홍콩에 출현한 민의와 사상의 추이에서부터 대화를 풀어나간다. 우산운동은 홍콩의 정부수반인 홍콩 행정장관 선출과 관련해 결국 보통선거를 쟁취하지 못한 채 마무리되고 말았고, 이후 홍콩 젊은이들은 직접 행동에 나서지 않는 기존 민주파의 온건 노선에 실망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중국으로부터 홍콩 독립을 지향하는 ‘본토파’라는 집단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자신의 문화적 뿌리를 홍콩에 두는 본토파는 새로운 형태의 홍콩 내셔널리즘 혹은 로컬리즘(본토주의)를 표방하면서 기성세대 민주파가 내세우는 ‘민주’나 ‘자유’ 등의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을 현실과 동떨어진 엘리트주의적 이상론이라고 조롱하기도 하면서, 우산운동의 가장 큰 성과가 민주파의 장례를 치른 것이라고 자평하기도 한다.
세대 간 분열,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의 대립, 보편주의와 지역주의의 대립은 홍콩의 우산운동을 이해하는 열쇠이자, 베이비붐 세대처럼 더는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없는 홍콩 젊은이들의 불안정한 현실이 반영된 현상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혼란스러운 현상이 비단 홍콩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 배경에 있는 전 세계적인 사회 불안정성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도시 국가 홍콩, 국민국가 일본이라는 변경
우선 저자들이 주목하는 일본과 홍콩의 공통점은 ‘변경’으로서의 위치다. 여기서 ‘변경’은 “자기만의 문화적인 표준을 구축하는 대신 중심의 그것을 변형시키며 생존해 온 지역”(26)으로 정의된다. 후쿠시마에 따르면, 그동안 일본 문화론에서 이러한 의미의 변경성을 자주 거론해 왔지만 일본 이외의 변경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아시아에서도, 서양에서도 변경일 수밖에 없었던 근대 일본은 오히려 자신이 변경임을 망각하는 데 몰두해 왔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일본이 변경임을 상기하면서 일본 이외의 변경과 비교하는 작업이 일본의 사회문화적 교착 상태에 대한 탈출구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청육만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네이션의 궤적을 따르는 일본, 한국, 대만과 달리 홍콩과 싱가포르는 전형적인 ‘도시적’ 사고를 취한다. … 도시인은 신용과 자본 외에는 근본적인 정체성이나 신앙이 없다. 가장 중요한 건 개인이나 동료의 생존이다. 도시의 다원 문화는 소위 보편적인 도덕적 이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 난민 사상이며, 시대와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피난소이자 성역 시스템이다”(18쪽)라고 말하듯, 홍콩의 경우 변경의 의미는 생존을 위한 능력과 관계있다.
메이지유신 이래 서구의 국민국가를 추구해 온 일본과 달리, 홍콩의 정체성은 동서양이 뒤섞인 코즈모폴리턴 도시였다. 그렇기에 홍콩이 우산운동을 계기로 내셔널리즘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은 변경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두 필자 간에 관점의 차이를 노출한다. 후쿠시마는 홍콩을 발전시켜 온 도시의 개방성이 내셔널리즘의 배타성과는 맞지 않다고 보면서, 오늘날의 홍콩 내셔널리즘이 과연 무엇을 목표로 하는 정치운동인지, 일본과 닮은 듯 다른 홍콩이 네이션으로 ‘독립’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묻는다.
지적인 산책으로서의 왕복 편지
‘변경의 사상’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이 책은 ‘변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해답을 모색하는 데 책의 절반 이상을 할애한다. 서구와 중국 내셔널리즘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제시되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변경 문화가 중국이나 미국에서 차지하는 의의 등에 비추어 변경의 의미가 새롭게 조명되기도 한다. 또한 국민국가와 내셔널리즘을 넘어서기 위해 ‘국가 단위보다는 도시 단위로’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한다.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결코 만만치 않은 무게감을 갖는 것임에도 학술서와 같은 체계적인 접근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편지의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주제가 자유롭게 솟아나는 경쾌한 글쓰기에 가깝다.
이 같은 비엘리트적 글쓰기는 우산운동을 전후로 한 홍콩의 사정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서 특히 이채를 띤다. 교양과 엘리트주의를 경멸하는 당대 홍콩 본토파의 표현 방식에는 종종 광둥어 속어나 비속어, 심지어 욕설과 같은 저속한 표현이 큰 주목을 받았고,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민의를 노골적으로 가시화했다. 기성 언론과는 친화력이 낮을 수밖에 신조어와 경박한 언어의 폭주 현상은 그들의 사상이 단지 지역성 때문에 홍콩 밖으로 잘 전달되지 않은 것이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일반적인 학술서라면 다루기 꺼릴 본토파의 이 노골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자유로운 형식의 편지에서는 홍콩 민의의 현장감과 솔직한 의중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열두 번째 편지’에서 후쿠시마는 두 사람의 왕복 편지가 헬스클럽보다는 산책에 가까운 활동이라고 말하면서, 헬스장이 제도와 규칙을 강제하는 가학적인 기계인데 반해, 산책은 정신을 복수화하는 행위로서 가장 도시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열네 편의 왕복 편지 역시 저자들은 중간 중간 아무 데나 들를 수 있는 산책처럼, 그때그때마다 눈에 들어온 풍경을 이야기할 수 있는, 어쩌면 가장 도시적인 정신을 재현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산책이야말로 답이 없는 미궁 같은 불확실한 현실에서 변경 사상의 강점인 유연한 사고를 이끌어낼 수 가장 좋은 처방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