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리던 날 온몸으로 맞고 싶었죠. 하지만 시인이 살고 있는 이곳에서는 찬 겨울비가 가득할 뿐. 호사스러운 카페에서 통창 너머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겨울비가 측은하게 보이는 거야! 저라고 첫눈으로 내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무언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되고 싶은 많은 것들 그래서 일찌감치 포기해 버린 시간과 미련들. 꼭 말해줄래요. 괜찮다고, 고맙다고. 눈이 되지 못해도 너무너무 좋았다고. 여기 있는 것으로, 나에게 그리고 길동무에게
- 시인의 말
나는 아버지가 적어도 나의 시대보다 훨씬 평화롭지 않은 시절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 나는 아버지의 삶 또한 내가 듣고 연대한 많은 이들의 그것처럼 수많은 투쟁의 집합체라는 것을, 내가 거기에 들어가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그 지점에서 나는 광장에서 처음 마주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졌다. 세상은 나의 슬픔에도 아픔에도 관심이 없다(p24, 〈기회〉)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 다름은 틀림이라 말하는 사회에 선택지를 빼앗겼던 청년(p105, 〈민들레꽃이 뽑혔습니다〉), 그리고 일상의 많은 일들에 내가 그런 것은 아닌지(p125, 〈핑계〉) 돌아보며 끝없이 생각을 멈추지 않는 지금의 아버지. 그런 것들은 짧은 문자열을 훑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 받아들여질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것이었다.
- 에필로그 ‘나는 이 시들을 읽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