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혐오, 가짜 뉴스, 무의미한 논쟁…
위험한 헛소리에 날리는 록산 게이 식 펀치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게 시민권, 인종 문제, 젠더 논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칼럼들의 배경에는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과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 동성 연인과의 결혼이라는 개인사 등 많은 일이 포함된다. 스스로가 주변부의 존재로서 차별과 혐오에 맞서온 만큼 이 책의 첫번째 장을 이루는 정체성 정치는 그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제다. 하지만 미국에서 보수는 물론이고 진보 진영에서도 정체성 정치의 정치적 힘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거세다. 록산 게이는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고 끌어안는 사람이 더 너른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담아 정체성 정치의 가능성을 글로 썼다.
그가 천착한 주제 중에는 미국의 분열된 정치 환경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날 정치는 신념과 이념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심지어 탄압하는 사람들로 인해 손쓸 수 없이 망가지고 있다. 미국에는 “초당적 지지를 받는” 전형적인 나이든 백인 남성 정치인이 대통령직을 줄줄이 꿰차고 있고, 여전히 숙고보다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치 상황에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고난은 점점 더 심해진다. 록산 게이는 나쁜 정치인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비극과 폭력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유권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침을 가한다. 더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정치에 좌절감이 들더라도, 끝내 절망에 굴복할 수는 없다는 마음, 더 나은 정치인을 뽑을 수 있다는 가능성, 우리 손으로 바꿀 수 있는 작은 행동들을 역설한다.
“스스로를 속여선 안 된다. 불만스럽다는 식의 고결함을 내세우며 당신의 정치적 입장을 가리지 마라. 두 눈을 똑똑히 뜨고 권력을 가진 자들부터 간 커진 추종자들까지 난 쭉 뻗은 길을 보라. 투표할 때 두 가지 악을 놓고 차악을 택하는 거라고 믿는 건 냉소다. (…) 뭔가를 하라. 뭐라도 하라.” (102~103쪽)
인종 문제는 록산 게이가 가장 통렬하고 무겁게 다루는 이슈다.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를 여전히 외쳐야만 하는 세상, 백인에 의한 흑인 사망자 명단에 새로운 이름이 계속해서 추가되는 미국 사회에서 자신은 “아직 죽지 않은 것만 같다”라며 진력난 마음을 토로하면서도 그 희생자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그 죽음을 복기한다.
문화비평은 문화 창작자이자 열렬한 소비자인 록산 게이의 전문 영역이다. 대중문화에서 다양성이 늘어나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창작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적 문제가 엄연히 존재한다. 록산 게이는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펴낸 저술가이자 마블 시리즈의 『블랙 팬서─월드 오브 와칸다』를 집필한 창작자로서 대중성과 작품성 둘 다 만족시켜야 하는 대중문화 산업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이 세상은 진공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창작자들은 크고 작은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는데, 그럴 때마다 창작자의 선택이 불러오는 파급효과에 대해 고민하고 책임질 것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백인우월주의 선동가의 책 판권을 사들인 출판사와의 책 계약을 해지한다든지, 가짜 뉴스와 선동으로 가득한 조 로건의 팟캐스트를 유치한 플랫폼에서 자신의 방송을 스트리밍하지 않는다든지 같은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예로 들며, 스스로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그 상황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자고 제안한다. 또, 그는 고유한 관점을 가진 예술가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마돈나, 저넬 모네이, 세라 폴슨, 테사 톰프슨 등과 인터뷰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세계적인 셀러브리티와 나눈 편안하고 솔직한 대화에서 록산 게이의 새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을 구하는 것은 대담하고 단단한 말이다
항의하고, 분노하고, 기억하는 말의 힘
2016년에 이어 2024년 트럼프 당선이 확실시된 현 상황에서 미국 시민은 물론 진보의 가치를 믿는 세계의 많은 이들이 정치에 대한 환멸과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록산 게이는 투표 당일,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Everything is going to be okay)”라며 자신이 믿는 가치를 옹호하는 후보에 투표한다는 열정적인 글을 올렸고, 선거 결과가 드러난 이후 그저 이 상황에 굴복할 순 없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이 괜찮아야만 한다(Everything Still Has to be Okay)”라고 썼다. 이 책에서도 내내 견지한 태도처럼 “우리에겐 환멸을 감당할 여유가 없”(103쪽)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부의 변화, 단번에 주어지는 해결책으로 이 복잡하고 진창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의 불행을 담보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이기심도 버려야 한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라는 말은 우리에게도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 그걸 두려움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의견을 벼려야 한다는 요청이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구할 수 있으며 구해낼”(114쪽) 수 있다. 정당하게 분노하고 끊임없이 항의함으로써 말이다. 늘 자신의 발언으로 사회에 책임지고자 노력하는 믿음직한 작가 록산 게이. 이 책의 번역자의 말처럼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지금, “책임감 있는 의견 쓰기란 무엇인가 묻는 이들에게”(433쪽) 건네고 싶은 책이다.
“분노는 본질적으로 나쁜 게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분노는 지극히 정상적인, 심지어 건강한 인간 감정이다. 분노를 통해 우리는 불만을 표현할 수 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혁명을 일으킬 만한 유용한 분노, 그리고 우리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무용한 분노의 차이를 아는 것이다.”(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