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의 체취가 밴 물건과 묵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
여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남은 유품을 통해 다시 엄마를 만난 딸, 저자가 있다. 엄마가 매일 쓰시던 일기장, 장롱 깊숙한 곳에 있던 흑백 사진, 동네 방앗간과 택배사무소 등의 온갖 전화번호가 빼곡하게 담긴 수첩, 휴대폰 속 처음 보는 엄마 사진들, 보내주신 먹을거리에 붙은 메모지 등에 여전히 엄마가 있었다. 엄마와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 엄마가 관심을 가졌던 것들, 엄마의 하루하루 일상을 전하는 이름과 숫자 등을 엄마가 떠나신 후에야 자식은 마주볼 수 있었던 셈이다. 미술사학자로서 연구를 하는 것처럼 마치 옛사람이 남긴 예술작품이나 생활용품을 대하듯, 부모와 자식 사이를 떠나, 엄마가 남긴 유품을 하나씩 가만히 들여다보니 미처 몰랐던, 사실 알려고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이 보였다. ‘엄마’로서만이 아니라 ‘영자 씨’로서의 그녀의 삶과 그 속에 자연스럽게 얽혀진 희로애락이 비로소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시절 수많은 ‘영자 씨’가 그랬듯이 엄마도 희로애락의 그래프가 교차하는 생을 살다 가셨다. 그 발자국을 조금씩 되짚어나가는 과정에서 이 책이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슬프고, 그립고, 아프지만, 따뜻하고, 사랑이 가득한 행복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엄마의 체취가 밴 물건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지고 묵은 기억을 들춰낼 때마다 가슴에 생채기가 나듯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이제 그 그리움과 눈물의 시간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며, 삶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영자 씨’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엄마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당연히 저자 정애 씨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자식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삶이라는 각자의 이야기는 그 시작이 있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끝도 있기 마련이다. 딸이 엄마가 남긴 유품을 정리하면서 풀어낸 한 개인, 한 가정, 한 시대의 이야기에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돈다. 결국 이 책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미술사학자인 저자가 책 곳곳에 세세한 역사적 고증을 더해 읽는 재미가 커졌다. 무엇보다 주인공 영자 씨가 유학 중인 딸에게 보낸 편지 속의 시가 백미다.”__강산에(음악인)
- 유품에 대한 예의를 지킨다는 것
: 우리가 박물관에서 만나는 유물은 사실 누군가의 유품이다.
미술사를 연구하는 저자는 주로 조선시대 회화가 제작된 시간과 공간, 사람의 역사와 의미망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수백 년 전에 그려진 그림을 뜯어보고 시대의 흔적을 하나씩 추적한다. 사실, 이렇게 연구에 활용하는 자료는 모두 누군가의 유품(遺品)이다. 그림은 화가와 주문자, 소장자와 얽혀 있고, 사서와 문집, 족보 같은 문자기록 역시 사람에 의해 생산되고 전승되었으니 모두 누군가의 유품이고 시대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즉 저자는 유품을 연구하는 일에 종사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박물관에서 만나는 유물도 사실 누군가의 유품이다. 그림이든 서적이든 생활용품이든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진열된 예술가의 소지품, 메모지 앞에서도 감동한다. 그 주인공은 대개 역사 속 이름난 사람들이다. 그와 달린 ‘민속’이라는 이름이 붙은 박물관에서는 역시 누군가의 유품인 민간 생활용품을 다룬다. 결과적으로 소수의 유명인과 다수의 무명인이 남긴 유품의 집적체가 인류의 역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유품의 사정은 어떠한가.
: 기억이라는 이름의 유품 정리는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유품’은 ‘고인이 생전에 사용하다 남긴 물건’이다. 저자의 사정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했다. 정신없이 장례를 마치고, 남은 일은 유품 정리였다. 엄마를 선산에 모시고 온 날부터 유품 정리에 돌입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엄마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뭔가에 떠밀리듯 엄마의 물건들을 죄다 꺼내 남길 것과 버릴 것으로 분류하고 정리했다. 그리고 자식들은 커다란 집에 홀로 남은 아버지를 뒤로 한 채 각자 도시로 귀환했다. 아버지마저 운명하신 후, 몇 차례 고향을 오가며 차근차근 정리하기로 했다. 50년 이상 이어진 가족사의 현장답게 본채와 행랑채로 이루어진 두 동의 건물 안팎에는 세월만큼 많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안방 서랍 속에서 처음 보는 자료들이 발견되어 놀랍기도 했다. 아버지가 60여 년 전에 작성한 혼서부터 졸업장・학생증・임명장・표창장 등 다양한 문건을 보관해 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 사이 남겨 두었던 엄마의 옷가지와 물품도 재분류해 정리하였다. 그러나 ‘기억’이라는 이름의 유품 정리는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 망자의 생 앞에 경의를 표하고 유품에 대한 예의를 갖출 때, 비로소 떠난 이와 남은 이 모두의 인간다움이 온존하지 않을까.
20세기 후반 이후 대가족 형태가 점차 해체되고 자손들이 독립된 세대로 분가하는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지방의 경우 고향을 떠나 타지, 특히 수도권으로 이주한 자손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상장례 풍속의 변화도 수반되었다. 자식들은 장례식이 끝나면 각자 생업에 복귀하기 바쁘고 고향집은 방치되거나 처분된다. 살풍경한 유품 정리의 세태도 시대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둘러보건대 장례를 마치자마자 대용량 종량제 봉투를 이용해 속전속결로 해치우는 유품 정리 방식이 당연시되어 가고 있다. 거기에는 예전에 비해 풍족해진 생활 여건과 죽은 사람의 물건을 기피하는 심리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누구도 값비싼 패물을 종량제 봉투에 넣지는 않는다. 서글프지만 유품을 대하는 우리 시대의 민낯이다.
누구든 지위와 명성, 재산의 유무를 떠나서 생과 사는 오롯이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망자의 생 앞에 경의를 표하고 유품에 대한 예의를 갖출 때, 비로소 떠난 이와 남은 이 모두의 인간다움이 온존하지 않을까. 유형의 물건이든 무형의 기억이든 유품은 주어진 생을 온 몸으로 살아낸 이들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 유품에는 시간과 이야기가 녹아 있다.
수년 동안 엄마의 유품을 정리해 온 여정은 저자만의 방식으로의 ‘씻김굿’이나 다름없었다. 이 책의 집필 작업은 망자의 옷을 태우고 굿판을 정리하는 과정이었다. 저자가 당골이 되어 춤과 노래 대신 펜으로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저자 자신을 위무하고 거듭나기 위한 이별의식이었다. 인간이 생을 찬미하고 생에 집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삶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죽음으로써 생명이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생은 고인이 남긴 물건과 기억, 바로 유형 혹은 무형의 ‘유품’을 통해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한다. 그것이 우리가 숨 쉬는 실체적 역사라고 본다. 그게 누구든 엄연한 생과 사는 차별 없이 존중받아야 하고 모두가 옷깃을 여며야 하는 이유이다.
2021년부터 한국국학진흥원에서는 멸실되거나 훼손될 위기에 있는 ‘근대기록문화조사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가유산청은 ‘근현대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이미 대부분의 국・공립박물관이 근현대 생활 문화 관련 유물을 폭넓게 수집하고 있다. 누구든 유품 정리를 앞두고 있다면, 적극적으로 기증(기탁) 제도를 활용하라고 권하고 싶다. 저자 역시 조만간 부모님의 유품을 적절한 기관에 맡기는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 굿바이, 영자 씨
앞으로도 저자는 누군가의 유품을 연구하는 미술사학자로서 남은 날들을 채워갈 것이다. 정선과 김홍도처럼 잘 알려진 화가뿐 아니라 익명의 화공이 남긴 유품, 곧 그들의 그림을 끌어안고 밤을 지새우고 키보드를 두드릴 것이다.
먼 훗날 재회한 엄마에게서 “내 딸 애썼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잘 지낼 것이다. 그래야 일평생 헛꽃의 소명을 완수하는 데 진력했던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은 위대한 헛꽃으로 살며 역사를 떠받친 저자의 엄마, 아니 세상의 모든 ‘영자 씨’에게 바치는 헌사(獻詞)다. 굿바이 영자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