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眞)과 미학의 수필
-문학평론가 유한근 교수 서평 중에서
인간의 문화가치 창조능력은 네 가지로 나눈다. 이 가치 창조능력에 따라 편의상 수필을 분류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첫 번째는 ‘지성에 의한 사고 능력’으로 창조된 것으로 지성적인 수필, 즉 ‘진(眞)’의 수필이다. 두 번째는 ‘의지에 따른 도덕적 행위’로서의 창조능력으로 이른바 ‘선(善)’의 수필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신앙을 통한 종교적 생활’ 성격의 수필로 ‘성(聖)’의 수필이고, 네 번째는 ‘정서적 표현의 미적 활동’에 의해서 쓰는 수필로 ‘미학(美學)’적인 수필이라 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문화가치 창조능력 중에서 대다수 작가가 원하는 능력은 네 번째 ‘정서적 표현의 미적 활동’을 원하게 된다. 문학도 예술 한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은 예술이 머물러 있기를 거부한다. 문학은 기술, 즉 아트(Art)이기도 하지만 학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수필의 경우에는 문학의 고전적 기능인 교시적 기능과 쾌락적 기능을 넉넉하게 해낼 수 있는 장르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문화가치 창조능력의 네 가지를 수행할 수 있으므로 이를 기준으로 그 특성을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병호 수필의 특성을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이를 가늠해 보기 위해 이번 수필집의 표제작인 「고구마 심는 날」부터 보기로 한다. 이 글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엊그제 고구마를 심었다. 봄 가뭄이 심해 하늘만 쳐다보던 끝에 겨우 심었다. 고구마는 순을 잘라 심는 까닭에 마른 땅에 심어놓으면 오래 못 가서 말라 죽는다. 물론 물을 넉넉히 주면 좋겠지만 우리 텃밭은 물이 없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을 기다렸다가 심는 요령이 생겼다.”와 같이 일상적인 자잘한 삶을 기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고구마를 심을 때는 흙을 파낸 자리에 물을 먼저 붓는다. 그러고 나서 고구마 줄기를 묻고 흙을 덮는다. 작년에는 물을 주지 않고 그냥 심었더니 뿌리를 내릴 때까지 상당히 어려움을 겪는 모양새였다. 비가 어지간히 오지 않고는 고구마 줄기가 묻힌 땅속까지 스며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가 많이 내리지 않을 것을 대비하여 땅을 적셔주면서 고구마를 심는 것이다. 이것도 여태껏 몰랐는데 얼마 전에 유튜브 영상에서 배운 것이다.
사실 농사 중에 가장 쉬운 것이 고구마 농사이다. 우선 고구마는 거름을 안 줘도 된다. 비옥한 땅보다 척박한 땅에 더 잘된다. 농약도 안 해도 된다. 특이하게 고구마는 병충해를 타지 않는다. 더욱이 김을 매줄 필요도 없다. 무성하게 뻗은 고구마 덩굴의 등쌀에 잡초가 자랄 틈이 없다. 고구마 덩굴의 기세가 잡초를 압도해버린다. 아마 농작물 중에 잡초를 이겨내는 것은 고구마뿐일 것이다.
- 수필 「고구마 심는 날」 중에서
고구마 농사에 필요한 정보나 지식은 굳이 수필문학에서는 필요하지 않다.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인용문에서는 앞부분의 “고구마를 심을 때는 흙을 파낸 자리에 물을 먼저 붓는다. 그러고 나서 고구마 줄기를 묻고 흙을 덮는다.”라는 부분과 “아마 농작물 중에 잡초를 이겨내는 것은 고구마뿐일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땅에 꽂아만 놓으면 저절로 되는 것이 고구마 농사라고 할 수 있다.”라는 부분은 고구마를 심는 농사의 지혜와 병충해와 잡초를 이겨내는 고구마의 강인성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밥 대신 고구마와 동치미로 버티었던 우리 선인들의 낭만(?)을 환기하면서 작가의 유년의 추억을 소환하기에 이른다.
곁들여 고구마를 다들 ‘감자’라고 불렀던 기억을 설명하기도 한다. “지금 ‘감자’라고 하는 것은 여름에 나온다고 하여 ‘하지감자’라고 불렀으니 혼동할 것은 없었다. 본디 고구마는 조선 영조 때 조엄(趙曮, 1719~1777)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대마도에서 들여왔는데, 이때 이름이 ‘감져(甘藷)’라고 하였으니, 내 어릴 때의 ‘감자’라는 호칭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통용되는 ‘고구마’가 대마도 사람들이 부르던 ‘고우꼬우이모(孝行芋)’에서 비롯된 점을 생각하면 ‘감자’야말로 우리의 자존심과 더 가까운 호칭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결말 부분에 이르러 요즘은 먹을거리가 넘쳐나 고구마가 예전처럼 간식 구실을 하지 못하고, 대신 건강식품으로 주목을 받고 있으며, “고구마는 알칼리성 식품으로 비타민과 무기질, 양질의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체중조절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특히 당근, 호박과 함께 폐암을 예방하는 3대 적황색 식품으로 고구마를 많이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에 비해 폐암 발생률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라는 정보도 소개하여, 지식을 통한 지혜 전언의 방편을 차용한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이 수필은 네 가지 창조가치 능력 중에서 첫 번째 ‘지성에 의한 사고 능력’으로 창조된 수필에 속하지만, 중간중간 자잘한 일상적 표현과 마지막 단락 “다행히 고구마를 심고 나니 오후에 비가 내렸다. 그런데 많은 비가 아니어서 ‘고작 이거야?’ 했는데, 내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는지 이튿날은 종일 비가 쏟아졌다. 시원한 빗줄기에 고구마순이 춤을 출 것을 생각하며,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야! 올해 고구마 농사도 절반은 성공이구나!”라는 정서적인 마무리를 하였다. 이런 부분은 네 번째 ‘정서적 표현의 미적 활동’에 의한 미학적 수필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수채화를 배운 지 5년의 체험을 모티프로 한 수필이다. 은퇴한 후 글쓰기와 그림 배우는 일로 생활이 바뀌면서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닮은 점이 많음을 밝히고 있다.
둘 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이라는 점이 그러하거니와 일상에서 작품 소재를 찾고 그것을 어떻게 멋지게 표현할까 고민하는 점이 유사하다. 글 쓰는 사람은 신문 기사 하나를 보더라도 이것을 글로 쓰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림 그리는 사람 역시 좋은 풍경을 만나면 저것을 어떻게 화폭에 담을 수 있을까 따져보게 된다.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도 작가는 더 좋은 표현을 찾고자 수없이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데, 화가도 가까이서 들여다보다가 멀찍이 물러나서 바라보다가 이리 지우고 저리 덧칠하며 고심을 거듭한다. 나는 글을 쓸 때 자신을 들여다보며 가장 진실해진다고 생각하는데, 그림을 그리는 시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작품을 완성했을 때 차오르는 성취감이야 말해 무엇하랴.
- 수필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중에서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소재 찾기와 형상화하는 점에서 작가의 고뇌가 닮았다고 이야기하면서, 내면의 성찰을 통해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점에서도 공통된다고 환기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글 쓰는 사람과 그림 그리는 사람의 차이를 유통의 문제에서도 살펴본다. “그림은 왜 이렇게 비쌀까? 문학작품이 책으로 수천 권, 수만 권도 찍어낼 수 있는 데 반해 그림은 원본 하나가 중요하고 복제품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리라. 진품이냐 모조품이냐 하는 논란은 오직 화단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닌가. 글 쓰는 쪽에서는 배가 아픈 노릇이 아닐 수 없다.”라는 토로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대다수 작가나 화가는 똑같이 살림살이가 어렵지만,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그저 노후에 치매나 안 걸릴 요량으로 취미 삼아 지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형편”이라는 마무리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유의 결과이다.
수필 「예술의 향기 작가의 힘」은 소로가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월든을 방문했던 류시화 시인의 글을 읽고 작가 자신도 기회가 있으면 월든을 찾고 싶은 충동이 일었음을 고백하면서,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생가 방문과 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리그 생가를 둘러보면서 예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느낀 소감을 진솔하게 서술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는 있는 괴테의 생가에 들러 감동 받은 일도 소개하며 더불어 작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순천문학관의 되돌아본다. “해외여행 중에 음악가나 문학가의 생가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모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저 길거리의 집 한 채이거나 부속 건물이 두어 개 딸린 시골집일 뿐인데도 세계의 관광객들이 줄지어 찾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향기요 작가의 힘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면서, 순천문학관도 조촐한 규모이지만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며, “방문객 가운데는 김승옥과 정채봉을 모르거나 작품을 전혀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문학관을 둘러보면서 작가의 이름을 새로 알게 되고 작품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만으로 문학관은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라고 작가는 생각한다. 그것이 크지 않지만 ‘예술의 향기’이고 ‘작가의 힘’이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