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우주를 담는 가볍고 단단한 예술, 디카시
페이지를 넘기다 흑백으로 찍은 고양이 사진을 만난다. 다섯 마리의 고양이가 모두 정면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게 꼭 단체 사진을 찍은 것 같다. 그 아래 이런 문장이 붙어 있다.
자아 여기 보세요
눈 감지 마세요
하나, 둘, 셋
멸치
이유상의 디카시 「가족사진」이다. 여기에 저자 최광임 시인은 이런 해설을 덧붙인다.
“이유상은 사람만이 우주의 중심이라 보지 않고, 가족 역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개별적 고유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고양이 가족에게는 '김치'가 아니라 “멸치”다. 고양이 가족의 단란한 때를 “멸치”로 잡아놓겠다는 재치라니. 우주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는 메시지라니.”
디카시의 가장 큰 장점은 누구나 쓰고 향유할 수 있어 접근성이 수월하다는 것이다. 낙엽 한 장, 애벌레 한 마리까지도 디카시의 소재나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디카시를 쓰는 일은 일상에서 우주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마음을 키우는 공부다.
「가족사진」은 독자가 보내온 시다. 누구나 쓰고 향유할 수 있다는 디카시의 장점을 이만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소재나 주제도 삶 한가운데의 가볍고 소소한 것을 가져왔다. 소소하지만 시시하지 않아서 우주를 담고 삶을 담고 있다. 최광임 시인의 해설 그대로 이유상의 「가족사진」을 읽고 보며 우리도 우주의 의미를 재발견한다. 마음이 한 뼘 커진다.
『풍경에서 피어난 말들』에 실린 80편의 디카시와 한 편 한 편마다 붙은 해설은 저마다의 우주를 만나게 하는 소박한 여행안내서 같다. 빗방울 맺힌 빨래집게는 공치는 날 노동자의 스산함으로 이어지고, 철판 위 흥건한 기름에 떠있는 호떡 반죽은 물수제비 놀이를 품는다. 어느 상인이 들깨 모 위에 써놓은 '들깨' 글자를 본 시인은 전날의 숙취가 '들 깨'라고 유머를 일갈한다. 사진과 문장과 제목을 차례대로 혹은 한꺼번에 읽고 보며, 디카시의 매력에 훅 빠진다. 공부가 된다. 마음만 키우는 게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안목도 깊어지고 높아진다. 이렇게 쉽고 재미난 공부라니.
디카시에 대한 이론적 이해와 실제 창작의 구체성을 살핀다
디카시는 새로운 갈래의 시놀이(유희하는 인간!) 예술이다. 디카시는 스마트폰의 카메라나 디지털카메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날시)을 포착하여 찍은 영상과 함께 문자로 표현한 시다. 사진과 문장이라는 각각의 독립적인 텍스트가 통합/융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것을 탄생시킨 21세기 최첨단 예술이다.
영상과 문장의 통합이자 융합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디카시에서는 시적 언술만으로는 의미가 형성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진만으로도 시적 의미를 형성할 수 없다. 사진과 문장이라는 각각의 독립적인 텍스트가 통합하여 전혀 새로운 어떤 것으로 융합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자주 오해되듯 기존의 시에 사진을 덧붙여 시를 효과적으로 감상하는 '포토포엠'이나, 사진을 설명·인용하는 '사진시'와 구별된다.
최광임 시인이 해설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디카시에서 사진은 잘 찍은 결정적 장면을 뽐내지 않는다. 잘 찍은 사진은 그 자체가 작품이다. 그에 비해 디카시의 사진은 꼭 작품일 필요가 없다. 디카시의 이미지는 서정시와 같이 화자의 시적 정서 또는 시적 정조 등과 호환한다. 다시 말해 디카시의 이미지는 시인의 정서적 의미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때로 구도가 잡히지 않은 사진도 디카시의 소재로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다. 사진의 구도나 작품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인의 정서적 반응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풍경에서 피어난 말들』에는 모두 80편의 디카시 작품이 실렸다. 시인이나 디카시인만이 아니라 직업도 연령도 제각각인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 수필가, 번역가, 화가, 가수, 초등학생, 대학생 그리고 외국 대학생까지 다양하다. '독자'라고만 밝힌 이들 각자의 세계를 더하면 정말 다채로운 이력으로 가득한 것을 알 수 있다. 수록 작품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디카시가 본격문학임과 동시에 생활문학으로 누구나 창작하고 향유할 수 있다는 점을 반영하였다.
이 책은 전문 시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직업과 연령의 사람들이 쓴 디카시의 정수들을 뽑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디카시의 독특한 매력에 흠뻑 빠지게 할 뿐만 아니라, 디카시에 대한 이론적 개입을 통하여 디카시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실제 창작에 있어서 디카시가 나아갈 길을 환하게 밝혀준다. 디카시에 대한 이론적 이해와 실제 창작의 구체적 사례들을 통해 디카시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최광임 시인의 이 책이야말로 바로 그 길을 보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