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프랑스인은 데카르트 학도나 파스칼 학도로 태어나거나 적어도 아주 어려서부터 둘 중 하나가 된다. - 앨런 블룸(Allan Bloom)
천재 과학자는 왜 종교에 귀의했을까?
확률론을 창시한 수학자, 최초의 계산기를 만든 과학자이자 발명가, 실존주의의 선구자가 된 사상가. 사람들이 블레즈 파스칼이라는 이름에 떠올리는 칭호들이다. 그는 흔히 수학자나 과학자로 더 잘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철학이나 신학 쪽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파스칼은 서른한 살이던 1654년 11월 23일 ‘불의 밤(Night of Fire)’이라고 불리는 신비 체험을 통해 뜨거운 감격과 환희 속에서 신을 만났고, 이후 기독교로 회심했다.
‘수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뻔한 사람’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파스칼이 종교에 귀의한 까닭은 무엇일까? 철두철미한 과학자였던 파스칼마저도 논리와 증거, 이성만으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일까?
“죄인은 티끌을 핥는다. 즉 세속적인 쾌락을 사랑한다.”
파스칼은 오만한 자기애와 돈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비롯된 성마름으로 삶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빚어왔다. 그는 종종 자신이 누리던 유명세에 어울리는 대우를 당연하게 기대했으며, 유산을 두고 누이와 말다툼을 벌인 일도 있었다. 이렇듯 파스칼은 숙고하는 철학자의 이미지에 그리 걸맞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자신이 의도했던 삶과 반대되는 온갖 부침을 겪으면서 힘들게 겸손과 사랑의 가치를 배웠다.
티끌을 핥는 모습은 삶이 주는 쾌락과 즐거움을 필사적으로 탐하려고 애쓰는 이미지다. 모든 사람이 쾌락을 즐기고 모든 사람이 즐거운 일을 좋아하므로, 그러한 태도를 무턱대고 비난할 수는 없다. 파스칼 역시 행복을 위해 즐거움이나 오락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자신과 삶을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위락, 즉 ‘diversion’이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듯이, 우리가 현세의 즐거움을 삶의 고통과 공허에서 도망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한 행복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초월하는 영원한 가치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영원성은 오직 신이 부여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말하는 삶의 의미란, 무한하고 절대적인 신을 마주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논리와 증거, 이성만으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파스칼은 어떤 이유로 신과 불멸이 삶의 의미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불멸이 없다면 나는 바다에 몸을 던지리라”라고 했던 시인 테니슨이나, “내세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이 삶은 아침에 옷을 주워 입을 가치도 없다”라고 했던 비스마르크처럼,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었을까? 파스칼은 불멸성에 대한 추구가 단순히 사후 세계의 존재를 갈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현 생애의 작은 것들에 훨씬 더 큰 가치를 부여하여 삶의 동력을 제공받기 위한 태도이다. 파스칼은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할 때는, 단순히 이성적인 추론만이 방법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는 탄생, 삶, 고통, 죽음…. 우리의 이성으로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사태들에 대하여 오로지 이론적 증명에만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자세이다. 그에 따르면 이성의 마지막 단계는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 무한히 많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188)
신은 왜 숨어 있는가? 신은 왜 세상 앞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
무신론자들이 기독교 신자들에게 흔히 하는 질문이 있다. “신이 있다면 왜 그렇게 꼭꼭 숨어 있는 거죠?”, “우리를 그렇게 염려하는 창조주가 있다면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요?” 저자는 이와 같은 질문에 파스칼의 논리를 빌려 대답한다. 만약 신이 그를 알고 사랑할 준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낸다면, 그런 계시는 축복이라기보다 저주라는 것이다.
모호함이 전혀 없다면 인간은 자기의 타락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빛이 전혀 없다면 인간은 치유를 바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얼마간은 숨어 있고 얼마간은 드러나 있는 것이 옳을 뿐만 아니라 유익하다. 자기의 비참함은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이나, 신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똑같이 위험하기 때문이다.(446)
이처럼 저자는 젊은 천재 파스칼을 고뇌하게 한 질문들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팡세》의 메모 속에 보물처럼 숨겨진 답을 찾아 나간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 앞의 비통한 실존은, 비단 파스칼뿐만이 아니라 부처, 톨스토이, 카뮈 등 동서고금의 현자들을 괴롭혔고 오늘날 우리 모두를 다시금 방황하게 만드는 고민들이다. 신의 존재와 믿음에 대한 파스칼의 통찰이 시대를 거듭하면서도 살아남은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합리적인 이성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알았으며 ‘맹목’을 거부했다. 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둘 다 합리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두 가지 과도한 것: 이성을 배제하는 것과 오로지 이성만을 인정하는 것.”(167)
미완의 고전 《팡세》에서 찾은 인생의 의미
신 없는 인간의 비참함과, 이성과 신앙의 본질을 탐구하며 세기의 고전 반열에 오른 파스칼의 《팡세》는 그가 39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완성되지 못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팡세》는 책을 쓰기 위해 파스칼이 적어놓은 900여 개의 단상과 메모들을 후대의 편집자들이 저마다의 기준에 따라 정리해놓은 것으로, 여러 판본들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높은 명성에 비해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워, 단순히 기독교 호교론이 담긴 명상록으로만 알려져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 정신의 최고봉’, ‘미완의 성전’, ‘인간의 언어로 번역된 신의 메시지’라고 일컬어지며 인류 사상사의 반석이 되었음에도, 이처럼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책은 드물다. 인문고전에 대한 관심이 유행처럼 돌아올 때마다 우리나라에서도 《팡세》를 찾는 독자가 더러 생겨나고는 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완독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간은 왜 티끌을 핥는가?》는 미국의 철학자 토머스 모리스가 《팡세》의 메모 중, ‘신, 불멸, 인생의 의미’에 해당되는 내용을 발췌하여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게 재구성한 저서다. 이 책은 미완의 《팡세》를 현대적으로 다시 쓰려는 시도로서 많은 이들의 공감과 호평을 얻었고, G. K. 체스터턴과 C. S. 루이스에 필적하는 기독교 옹호론의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신학과 철학을 접목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여온 저자는, 대중적인 시각과 생생하고 유머러스한 필치로 철학과 문학, 영화 등의 예시를 곁들여 《팡세》의 내용을 한층 풍부하게 풀어낸다. 그동안 《팡세》에 담긴 의미를 지레짐작으로만 알고 있던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파스칼이 《팡세》에 담으려고 한 뜻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