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인 화산분출물을 피해 탈출하는 도망자들에서 시작해
폼페이 유적지를 안내하는 지극히 실용적인 가이드로 끝맺는
탁월한 역사서이자 여행안내서!
그리스 로마 연구자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독창적인 메리 비어드의 역작
이 책의 저자 메리 비어드는 그리스 로마의 언어와 문학, 역사 분야의 연구자로, 일반 대중에게 친근한 글쓰기 재능과 소통력을 갖춰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전학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것 외에 텔레비전, 라디오, 각종 잡지, 블로그 등을 통해 왕성히 활동하는 그녀는 BBC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진행자로도 활약하고 있다. 그런 명성에 비해 국내에는 그의 번역서가 거의 소개된 바 없는데, 이번에 글항아리에서 메리 비어드 선집을 선보이게 되었다. 비어드가 남성 주도적이었던 고전학 분야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는 이유는,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이 학문적인 전문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대중이 쉽게 읽도록 배려하는 글을 쓴다는 데 있다. 그러한 저자를 향한 평가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편안하고 쉬운 비어드의 문체를 보면 독자를 정말로 소중히 여긴다는 생각이 든다. 정통 학자들 사이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마이클 바이워터)
그동안 폼페이에 관한 많은 역사서와 문학서는 폼페이에 화산분출이 있던 마지막 날에 초점을 맞춰 극렬한 비극성을 강조해왔다. 반면 이 책은 “일상적인 것을 다루는” 데 지향점을 두고 현재 남아 있는 유적과 그 화려한 면모들을 통해 폼페이 사람들의 일상을 추적해 들어간다. 사실상 폼페이에 관한 연구나 역사서, 대중서들은 그동안 유적을 통해 지나친 억측을 많이 해왔다. 그런 가운데 이 책은 학술적으로 탄탄한 연구 기반 위에 흥미로운 역사서로 집필되었다는 게 특징인데, 특히 기존의 통념들을 뒤집는 논거도 많이 담고 있다. 내용은 마치 로마의 뒷골목을 탐색하듯 도시를 가로지르며 진행된다. 폼페이 도로에도 마차가 달리는 일방통행로가 있었다는 이야기, 부촌과 달동네 구분 없이 대갓집과 서민 주택이 뒤섞여 있었다는 이야기, 실내장식 취향, 빵집 주인, 금융업자, 가룸 제조업자 등의 먹고사는 이야기, 로마 하면 떠오르는 음식, 포도주, 섹스, 목욕, 오락, 게임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어느 건물에 남겨진 낙서를 통해 보는 폼페이 청년의 짝사랑, 여관방에 요강이 없다고 불평하는 투숙객까지, 때로는 지금의 우리와 비슷해서 공감 가고, 많이 달라서 신기한 고대인의 일상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수용 인원이 2만 명이나 되는 원형경기장을 보고 화장실이 없는데 구경꾼들이 어디서 볼일을 해결했을까를 궁금해하고, 발굴 유골의 치아에 끼어 있는 치석을 보며 폼페이는 입 냄새가 심한 도시였을 거라고 추정하는 비어드 특유의 엉뚱함과 반전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물론 화산재에 묻혀 죽어가는 고대인의 단말마의 고통을 포착한 석고상, 폼페이의 역사, 멸망, 발굴 유적의 용도 등을 둘러싼 굵직한 논란의 주제들도 비켜가지 않는다. 독자들은 폼페이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저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풀어놓으며 알고 있으나 동시에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폼페이 역설’을 제기한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게 된 독자들은 폼페이의 이모저모를 속속들이 경험하며 폼페이 역설을 깨부술 생생한 지적 무기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복잡한 흔적을 가진 도시
서기 79년 8월 25일 이른 시각의 폼페이. 베수비오 화산분출 희생자를 통해 우리는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고대 세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유골과 석고상을 통해 재구성되는 당시 실존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선택, 결정, 그들이 품었던 헛된 희망……. 우리는 비록 고고학자가 아니지만 화산폭발 당시 최소한의 물품만 든 채 집 밖으로 뛰쳐나왔던 이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다행히 발굴된 유해로부터 갖가지 개인 정보를 찾아내는 능력이 과거에 비해 진보하면서 우리가 만나는 폼페이 사람들의 모습은 한층 구체화되었고 사연도 풍부해졌다. 비어드는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쳐버린 것에 주목해 일상을 깊숙이 파헤쳐 거대한 역사를 재구성해낸다. 특히 그동안 지녔던 폼페이에 관한 상식이 깨지는 순간 통쾌함과 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비어드식 반전 몇몇을 살펴보자.
·폼페이는 입내가 심한 도시다?
폼페이 사람들 대부분은 치아의 법랑질 부분에 고리 모양 흔적들을 지니고 있는데, 유년 시절에 겪은 여러 차례의 전염성 질환을 말해준다. 이는 로마 시대 유아들이 처한 위험천만한 상황을 상기시키는 좋은 예로, 그 당시 태어난 아이들의 절반은 10세 이전에 죽었다고 한다. 현대 서구인에 비하면 정도가 약한 편이지만 분명히 드러난 치아 부식의 증거는 당분과 녹말이 많이 함유된 식생활을 말해주며 인상적인 것은 모든 유골의 치아에 치석이 보인다는 점이다. 비어드는 이처럼 치석이 심했던 이유는 칫솔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폼페이는 입내가 심한 도시였을 것이라는 재치 있는 생각을 내놓는다.
·폼페이는 ‘일순간에 모든 것이 정지된’ 도시다?
대부분의 사람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폼페이가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일상이 진행되다가 화산분출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된 도시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대부분의 안내서와 여행 책자는 그런 식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저자는 폼페이가 훨씬 더 난해하며 그렇기 때문에 흥미로운 공간임을 전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여러 차례에 걸쳐 붕괴와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주민들은 철수했고, 이어서 약탈까지 당해 복잡한 흔적과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그러한 흔적과 상처를 다룸으로써 ‘폼페이 역설’을 제시한다.
·폼페이는 두 번 죽었다?
이는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오래된 농담이다. 첫 번째 죽음은 베수비오 화산폭발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말하고,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두 번째는 18세기 중반 발굴이 시작된 이후 도시에서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죽음을 말한다. 폼페이 고고학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여러 원인에 의해 서서히 파괴되고 있다. 관광객의 출입이 금지된 지역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발굴 이후 박물관으로 떼어가지 않고 남겨두었던 벽화들은 희미하게 바래어 애초의 화려한 색채는커녕 형태를 확인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이는 화산 폭발 때와는 달리 서서히 진행되는 파괴 과정으로, 잦은 지진과 끊임없이 밀려오는 관광객이 죽음의 과정을 재촉하고 있음을 전한다. 또한 유적지에 기승했던 도둑과 공공 기물 파괴자들이 두 번째 죽음을 부추긴 원인으로 꼽힌다. 폼페이처럼 넓은 유적지는 감시가 어려워 그들의 집중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방문객들이 보는 로마 시대의 유적은 오늘날까지 기적적으로 보존된 것이 아니라 작업이 완료된 결과물이라고 말하는데, 폼페이의 지명과 구획 대부분이 현대식이라는 것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폼페이의 일상 엿보기
폼페이에 생명이 가득할 때, 그곳의 일상은 어땠을까? 우리는 화산이 분출하여 급하게 도시를 떠나던 사람들이 죽음을 피하지 못했던 장면과 재로 덮인 도시로 역사에 남은 신비로움에 압도당해 있었다. 그러나 재로 덮이기 전, 폼페이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더욱 주목했어야 할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폼페이는 구역 구분이 없었다?
저자는 폼페이가 전반적으로 지역 간 차이보다는 유사성이 훨씬 더 두드러진다고 전한다. 이는 사회지리학자들이 ‘구역 구분’으로 표현하는 현대 서구 도시들의 두드러진 경향과는 매우 상반된다. 현대 도시는 상업, 산업, 주거 등의 활동이 특정 지역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으며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 때로는 인종 사이에도 뚜렷한 지역 구분이 생긴다. 그러나 폼페이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구역 구분이 없는 도시, 즉 상류층 주거지와 비상류층 주거지의 명확한 구분이 없는 도시였다. 그런 예의 또 하나로 변소 공간을 들 수 있다. 변소 는 주택 규모와 상관없이 하나뿐이며 대체로 부엌에서 발견된다. 부분적으로는 칸막이가 쳐져 있지만 문이 있었던 흔적은 없다. 현대인은 다른 건 몰라도 화장실에서만큼은 완벽한 ‘사생활 보호’를 원하는 반면 로마인은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로마인은 매일 격식을 차린 저녁 식사를 즐겼다?
폼페이 주택의 부엌은 워낙 규모가 작고 볼품없어서 관광객들이 그냥 지나치기도 하지만 식당은 확실히 눈길을 끄는 공간이다. 폼페이 사람들이 가장 공들여 우아하게 꾸민 공간 중 하나가 바로 식당이기 때문이다. 라틴어로 식당은 ‘트리클리니움’이라고 하는데 풀이하면 ‘세 개의 긴 의자’란 뜻이다. 이것은 참석자 세 명이 비스듬히 앉아 식사를 하는, 격식 있는 로마 만찬의 일반적인 형태가 반영된 명칭이다. 그러나 저자는 로마인들이 매일 이렇듯 격식 차린 저녁 식사를 즐기진 않았다고 말한다. 이는 몇몇 단편적인 사례를 토대 삼은, 빈약한 근거에 의존한 일반화의 오류다. 사실 대부분의 폼페이 주택에는 트리클리니움 자체가 없으며, 부유한 집에서도 트리클리니움 만찬이 일상이라기보다는 이례적 행사였던 것이다.
·로마에는 해방노예가 있었다?
그리스와 달리 로마에서는 장기간 의무를 다한 민가의 노예들에게 자유가 주어지곤 했다. 이는 인도적 차원에 따른 주인의 동정심과 경제적 이익의 결합으로부터 비롯된 관대한 처분이었다. 집안 노동을 소화하기 어려운 늙은 노예를 풀어줌으로써 먹는 입을 줄일 수 있고, 더불어 다른 노예들로 하여금 성실한 노동과 복종을 유도할 수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해방노예는 다양한 방식으로 예속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주인의 상업활동을 돕거나, 어엿한 가정을 꾸린 뒤에도 예전 주인의 집에 계속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라틴어 ‘파밀리아familia’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가족family’이 아니라 노예와 해방노예까지 포함하는 넓은 범주의 가족household을 의미한다.
·폼페이에는 신과 여신들이 바글거렸다?
실제로 폼페이에 존재하는 여러 신의 이미지는 성별을 떠나 수천 가지 모양을 한다. 다채로운 표현 수단을 통해 형상화된 신들을 모두 세어본다면 당시 거주하던 시민들 수보다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대 신들의 이미지를 천편일률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보통은 어떤 신인지를 확인해주는 핵심 특징을 파악하는 정도에 그칠 뿐 그 이상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저자는 이런 태도는 신의 이미지가 고대 세계에서 지녔던 문화적, 종교적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당시에는 세상에 신성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고, 지적인 관점에서든 종교적인 관점에서든 무신론이라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견해였다. 폼페이 사람들이 일생생활에서 마주했던 여러 신과 여신의 이미지는 훨씬 더 다양한 의미를 지녔다는 것과 물리적인 형상을 달리 표현하여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폼페이 속 육체의 쾌락
폼페이의 음식, 섹스, 목욕 등 그들이 추구한 육체의 쾌락이 궁금하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한 쌍의 은잔에는 해골들이 유쾌한 파티를 벌이는 모습이 장식되어 있고,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름과 함께 철학적인 문구까지 덧붙여져 있다. “쾌락이야말로 인생의 목표다!”
·로마의 여자들은 음탕하며 자유분방하다?
로마 시인과 역사가들이 말하는 선정적이고 음탕하며 자유분방한 로마 여자들의 이야기는 많은 부분이 허구이며, 황실에 속한 극히 예외적인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당시는 여자가 자신의 인생, 운명, 성을 통제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저자가 전하는 존경받는 기혼 여성의 주요 역할은 두 가지다. 첫째는 출산이라는 위험천만한 일이고(현대 이전 모든 시기에 그렇듯이 고대 로마에서도 출산은 주요한 사망 요인이었다), 둘째는 주택과 가정을 건사하는 일이었다. 로마 시대의 어느 유명한 묘비명에서는 이런 세태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비문의 핵심은 “그녀는 두 아들을 낳았고 (…) 가정을 잘 지켰고 모직물을 짰다”는 것이었다.
·로마 상류층 남자들은 성생활을 쾌락 및 권력과 직결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다. 로마 상류층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성기 삽입을 쾌락 및 권력과 직결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성행위 상대는 어느 성별이든 가능했고 남성 간의 성행위도 많았으며 동성애를 배타적인 생활 방식으로 간주했다는 단서도 거의 없다. 로마 남자들은 요절한 경우를 빼고는 모두 결혼했고, 기혼남이 아내에 대해 정절을 지키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거나 특별히 존경할 만한 행위로 보지 않았다. 다만 쾌락 추구에 관한 한 다른 상류층 남자의 아내, 딸, 아들은 금지 대상이었으며 노예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먼저 취하는 사람이 임자였다. 남자가 자기 노예와 잠자리를 갖는 것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고, 부분적으로는 그것이 노예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노예와의 성관계가 여의치 않은 가난한 시민들은 밖으로 나가 매춘부를 찾았을 것이다.
·로마의 목욕 문화는 도덕성에 관해 모순된 견해가 병존했다?
로마에서 목욕은 ‘로마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로마인은 어디를 가든 목욕을 했다고 한다. 목욕은 단지 청결 수단만이 아니라 다양한 활동의 종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목욕탕 건물은 로마에서 가장 많은 공을 들인 첨단 건물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목욕탕은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어주는 매개체인 동시에 로마사회의 불평등한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목욕할 때는 꾸밈이나 표식 없이 날것의 로마를 보여주는 곳이므로 현대의 어느 역사가의 말처럼 “사회계급 제도라는 오존층에 난 구멍”이었다. 그러면서도 목욕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습관이라는 강한 의혹도 제기되었다. 당시는 소변이나 인체 오물로 인한 오염을 완화시킬 염소 소독 같은 방법이 없던 시대였으므로 그 자체로 대량의 박테리아 번식장이었을 것이다. 목욕탕은 폼페이 서민들에게 경이와 쾌락, 화려한 아름다움을 두루 맛볼 수 있는 경이로운 공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들을 죽게 만들 수도 있는 위험한 공간이었다.
·로마인의 휴일을 위해 도살당한다?
폼페이 주민의 휴일 외출은 검투사와 맹수, 검투사와 검투사의 싸움을 관람하기 위함일 때때가 많았다고 한다. 때로는 한쪽이 죽어야만 경기가 종결되는 잔인한 볼거리였지만 검투사 경기 관람은 분명 로마인들의 중요한 여가활동이었다. 검투사 경기와 동물 사냥이 치러지던 원형경기장은 지금도 폼페이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유적지로 손꼽힌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폼페이에는 그다지 이국적인 동물들이 없다. 저자는 현재까지의 증거를 종합해보면 폼페이 쇼에 나오는 동물들은 현지에서 조달되었으며, 심지어 황소나 곰보다는 개나 염소를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폼페이 원형경기장의 동물사냥은 요즘으로 치면 ‘야생동물 보호구역’보다는 ‘어린이 동물원’에 가까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