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동물, 자연과 교감하는 방식
거대한 자연을 몸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일은 중요하다. 우리가 평생에 걸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세계는 한정적이고, 자연의 민낯은 대부분 그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어딘가에 그러한 자연의 웅장함이 있다는 걸 아는 일은 때때로 우리 눈을 조금 더 밝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한다. 자연이 스스로 번성해 온 시간을, 그리고 인간에 의해 훼손되는 모습을 말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식량을 공급하거나 터전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재난의 씨앗이 될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재난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며 늘 환경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빙하가 얼마나 많이 녹았는지, 북극곰의 터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바닷속에서 폐어구에 걸린 거북이 얼마나 많은지. 만년설은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고, 우리는 언제까지 섬의 짭짤한 바람을 몸소 느껴볼 수 있을지. 물론 모두가 잘 알고, 또 문제의식을 느끼고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에 따른 현실 감각은 아예 다른 문제다. 일상에서 무너져 내리는 빙하를 볼 일이 없고, 만년설이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모르니까. 그럴 때 ‘그림’은 그 모든 걸 상상해 보게 만드는 사실 전달원이 된다. 이 책을 처음 펼치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넘기는 그 순간까지, 하얀 눈에 압도당하는 그 느낌을 아마 지우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의 섬세하고 압도적인 그림은 자연이 얼마나 거대하고, 또 우리가 얼마나 한낱 작은 생물로써 이 지구를 가득 채우며 살아가는지 알게 한다.
지구는 조금씩 더 아프고, 생태계는 무너져가고, 산에 살던 여우나 오소리 혹은 새들마저도 터전을 잃어 자꾸 사람이 사는 곳으로 내려온다. 자연을 이겨 먹으려는 인간의 무지함이 만들어 낸 비극 중 하나다. 그러나 우리는 끝끝내 자연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역시 그런 자연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이겨 보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지지 않으려 싸우기도, 또 무참히 졌다는 걸 인정하고 순응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과 교감해 끝내 길을 찾아서 내가 만든 공간으로 회귀하는 것. 〈흰, 눈이 그치면〉은 그런 힘에 관해 말하는 책이다.
고요한 숲속에서 ‘나’를 찾는 중
이 책은 주인공이 자연 속에서 길을 잃고, 길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깊이 있게 묘사한다. 눈 덮인 숲에서 길을 잃은 주인공이 느낄 법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그가 겪는 두려움과 고립감에 집중하는 것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다. 이 과정에서 눈은 단순한 배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눈은 모든 걸 덮어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는 도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길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주인공은 자기만의 두려움과 마주하게 되고, 그 두려움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이 책을 쓴 스테판 키엘은 고립과 두려움이 어떻게 인간을 변화시키는지를 ‘눈 속에서 길을 잃은 주인공’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길을 잃었다는 건 단순히 물리적인 의미도 있지만, 심리적인 혼란과 정체성의 혼란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는 익숙했던 세계로부터 벗어나 눈 속에서 모든 것이 사라진 낯선 환경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결국 자기가 걸어왔던 길,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기회를 얻는다. 결국 이를 통해 주인공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잃어버렸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게 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여우를 만지기 위해 고요한 숲으로 뛰어들게 했던 숲의 깊이는 주인공을 성장하게 만드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독자는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가며, 인생에서 겪는 혼란과 어려움이 결국에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더 명확한 방향을 향해 나아갈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느끼게 한다. ‘길을 잃는다’는 건 혼란과 막막함에 기반함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걸어 보라는 뜻일 수도 있다는 걸 조용히 일깨워 주는 책이다.
아주 작은 존재로 살아가기
스테판 키엘은 그동안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을 그림으로 표현해 온 작가다. 그리고 이번 신작인 〈흰, 눈이 그치면〉에서는 설산과 그곳을 뒤덮은 만년설에 관해 말한다. 그래서 웅장하고 하얗게 자연을 묘사한 그림을 보다 보면 그 속에 빠져들게 될지도 모른다. 이를 통해 이 책에서 느껴볼 수 있는 묘미가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람을 찾는 일이다. 사람이 전부 작게 표현되어 있어서 그림 내에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인간은 자연 속에서 아주 작은 존재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정말 숲 안에서는 숲을 볼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정말로 숲이 다 보이는 집에 살아가면서도, 주인공은 숲의 무서움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그곳으로 몸을 던져야 자연의 표정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걸 〈흰, 눈이 그치면〉을 통해 느껴봐도 좋겠다.
본문 중간에서 전환점을 맞이하게 하는 ‘트레싱지’ 역시 이 책의 볼륨을 살필 수 있는 부분이다. 서로 그림이 중첩되고 비치면서 그림자가 쌓이고 쌓이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정말로 자연은 그렇게 커다랗다는 것처럼, 어두움을 보여주듯, 사람도 배경도 숲속으로 사라져가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예술적 요소들은 책의 분위기를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드는데, 숲의 나무와 가장 가까운 ‘종이’ 그 자체가 주는 질감과 멋을 한 번 느껴보면 좋겠다. 압도적이고 멋진 그림을 통해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읽으며 환경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림책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 책이다.
이 책의 ‘눈’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다. 이 거대한 하양과 웅장함은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혼란과 어려움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도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길을 잃게 만든 것도 눈이었지만, 길을 찾게 만든 것도 눈이니까. 나침반도 없이 헤맬지라도, 가장 막막할 때 정확한 이정표가 되어 주었던 눈. 그러니 눈 속에서 잃어버린 것은 그 안에서만 찾을 수 있고, 거기서부터 우리는 다시 출발할 수 있다는 걸 떠올려 보자. 모든 걸 덮어 사라지게 만들지만, 헤맨다 한들 다시금 새로운 길을 찾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도록. 〈흰, 눈이 그치면〉이 여러분과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