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으로 추가]
주말 이후 원기의 그녀는 아무런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나중에 원기에게 ‘친구로서 네가 좋다’는 말만 해주었다고 한다. 원기의 대형 사고는 그녀의 거절로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아내와 내가 원기의 이 용감한 행동을 걱정한 건 혹시나 원기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아이나 학부모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에게는 원기가 특별하고 소중한 아이지만, 다른 아이나 부모들은 어쩌면 원기를 피하고 싶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행히 염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원기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곤 한다.
“아빠, 나 결혼 못하면 어떡하지? 누구랑 살지? 아빠 엄마랑 같이 살아도 돼?”
“당연하지. 원기는 언제나 아빠 엄마랑 살면 돼. 걱정 붙들어 매셔!”
원기에게는 씩씩하게 말했지만 이런 얘기를 나누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녀석이 자기 상태에 대해 알고 말하는 건가 하는 걱정이 들어서다. 혹 자기 미래를 어느 정도 포기한 건 아닌지 불안할 때도 있다.
나이가 들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 함께하고 싶어지는 당연한 일을 원기는 할 수 있을까?
_[원기의 그녀] 중에서
원기가 소아조로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내와 밤마다 나눈 이야기가 있다.
“원기가 유치원을 졸업할 수 있을까?”
“원기가 초등학교에 갈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 원기가 유치원 졸업발표회를 하던 날, 아내와 나는 긴장해서 큰 눈만 껌뻑거리던 녀석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건강하게 유치원을 졸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이제 열두 살이 된 원기는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사춘기에 접어들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녀석은 내 새끼손가락을 잡아야 할 만큼 키가 작다. 다섯 살에도 열두 살에도 말이다.
원기가 내 새끼손가락을 잡고 걸어다니기 시작했을 때 나는 녀석이 얼른 커서 손을 잡고 걸어갈 수 있었으면, 더 크면 어깨동무를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상상했다. 물론 전혀 상상치 못한 방향으로 인생은 흘러갔지만…. 그 막막하기만 하던 길 한복판에서 우리 가족은 조금씩 방향을 잡았고 그렇게 곧장 걸어나갔다. 어쩌면 갈기갈기 찢길 것만 같았던 그 힘든 시간이 우리 가족을 더 끈끈하게 엮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진짜 가족이 된 것 같다.
_[새끼손가락] 중에서
시간을 달리는 소년 원기와
그 가족이 전하는 작지만 따뜻한 위로
MBC [휴먼다큐 사랑] “시간을 달리는 소년 원기”, KBS [인간극장] “우리 집에 어린왕자가 산다”에 소개되면서 그 사연이 널리 알려진 국내 유일의 소아조로증 환아 원기. 소아조로증이라는 병은 영화로도 제작된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의 핵심 소재로 사용되면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현재 국내에서 소아조로증을 앓는 사람은 원기 한 명뿐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채 100명이 되지 않는다. 희귀질환인 만큼 지금은 원인만 밝혀졌을 뿐 마땅한 치료약이 존재하지 않는다.
의학보고서에 따르면 열두 살인 원기에게는 길어야 5~7년의 시간만 남아 있다. 100센티미터가 겨우 넘는, 앙상한 팔다리로 구부정하게 걷는, 손발톱조차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원기는 그러나 누구보다 밝고 명랑하다. 이 책은 원기 아빠인 저자가 원기와 그 가족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일기 형식으로 써내려간 고통의 기록이자 위로의 이야기다. 춘천의 한 대학병원에서 원기의 병명을 알게 되었던 때부터 원기의 병을 치료하겠다며 정신없이 뛰어다녔던 시간들, 그리고 조로증재단이 개발한 임상약에 희망을 걸고 보스턴까지 건너갔지만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순간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삶의 가혹했던 기억들을 때로는 투박하게, 때로는 솔직하게, 때로는 절제된 언어로 담담하게 담아냈다.
절망의 순간 원기와 가족을 다시 일으킨 건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밝고 천진난만한 원기의 목소리, 웃음소리였다. 저자는 웃을 일이 있으면 마음껏 웃고, 슬퍼할 일이 있으면 마음껏 슬퍼하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인정하고 충실하게 사는 것이 진짜 행복이고 기쁨이라는 것을 원기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깨닫는다. 원기는 시도 때도 없이 장난을 치고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놀 수 있을지 궁리하는 영락없는 그 또래 아이였다. 단지 다른 아이보다 조금 더 빠른 삶을 사는 것뿐이다.
이 책에 종종 등장하는 “아빠, 닥쳐”라는 부자간의 대화는 많은 것을 겪어낸 이들의 애틋함이 느껴지는 사랑 깊은 언어다. 아빠와 엄마는 이제 여느 가정처럼 아이와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무얼 먹여야 할지 고민한다. 이들에게는 더이상 고통에 얽매여 가슴 아파할 시간이 없다. 저자는 말한다.
“한때는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아들과 함께하는 그 운명이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그 원망과 분노는 사라져버렸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즐겁고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니까. 온 힘을 다해 행복하다고 느끼는 시간을 즐기는 삶,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며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삶이 내게는 가장 가치 있는 삶이 되었다.”
저자는 사람들이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내는 데에, 그 시간 속에서 또다른 행복을 찾는 데에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한다. 그 소박한 바람처럼 이 책은 그 누구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진짜 위로’를 우리에게 건네며 삶의 의미를 통찰하게 만든다.
“이 기록이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아픈 가족이 있거나 말도 안 되는 시련을 겪는 이들에게 말이다.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니는 이들에게 어쩌면 이 글은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하겠지만, 인생이란 게 어찌 계획대로만 될 수 있겠는가. 삶의 수많은 변수와 맞닥뜨렸던 수많은 이에게 이 글이 작은 위로가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