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위로와 희망을 선사하는 구도자의 풍경!
김인호 시인의 포토에세이 『나를 살린 풍경들』이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포토에세이 『나를 살린 풍경들』은 시인이 도시를 떠나와 섬진강과 지리산 아랫마을 살이 10여 년 동안 지리산과 섬진강에서 찾은 삶의 치유와 회복의 기록이다.
시인은 오랜 시간 동안 『섬진강 편지』, 『꽃앞에 무릎을 꿇다』, 『지리산에서 섬진강을 보다』 등을 통해 지리산과 섬진강의 아름다움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해 왔다. 삶의 일상과 자연을 특별한 예술적 기교보다 순간의 감정과 풍경으로 담아내는 데 집중해 왔다. 특히 이번 책은 시인이 암 투병이라는 삶의 어려운 순간을 지나오며 자신을 보듬고 품어 준 풍경과 그에 대한 성찰을 담은 첫 포토에세이다.
단풍 시들해지고 찬바람이 스며드는 날들, 나의 투병 일기가 딱 일 년을 맞는 날에 저녁 예불 시간에 맞춰 화엄사에 들었다. 둥더덕 더덕 둥더덕 더덕, 중생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법고가 울리고, 두웅 두우웅 두웅 범종 소리는 어두워지는 하늘로 올라 각황전 너머 파르스름 하늘 별들도 깨운다.
-「화엄사 저녁 예불」 중에서
시인은 섬진강과 지리산이 자신을 살렸다고 한다. 오백 리 길 섬진강 윤슬, 아침 운해, 사성암에서 보는 저물녘 붉은 노을, 지리산 아흔아홉골 산그리메, 선연한 풀꽃들이 “삼백예순 날 투병의 시간을 건너와” 자신을 치유하고 치료해 준 전속 주치의라고 명명한다.
문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있어 나가 보니 마을 후배가 쌀 한 포대를 마루에 부려 놓는다. 추수했다고 햅쌀 맛 좀 보시라 내려놓고 서둘러 다음 집으로 간다. 해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루돌프 사슴 썰매 대신 1톤 포터를 몰고 골목길을 오가는 마을 산타들!
-「녹명(鹿鳴)」 중에서
먼저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다른 사슴들을 부르는 울음소리가 녹명이다. 대개 짐승들은 먹이를 발견하면 누구한테 뺏길세라 허겁지겁 혼자 먹는다. 그런데 사슴은 목을 길게 빼고 울음 울어 친구들을 부르는 것이다. 하물며 인간은 어떠한가. 자본과 물질문명 속에서 내 것을 챙기기 급급하고 자기 유리한 쪽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피폐해지는 현실사회 속에서 시인의 이웃과 마을과 지역은 시인이 날마다 걷고 바라보는 지리산의 품과 섬진강의 물결처럼 이렇게 넓고 그윽하다. 해마다 이상 기후와 노령화로 인해 점점 힘들어지는 농사일에도 불구하고 “쌀 한 포대를 마루에 부려 놓는” “마을 산타들!” ‘녹명’은 저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두루두루 함께 어울려 같이 잘 살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긴 아름다운 말이자 우리가 끝끝내 지켜내야 할 공동체 정신이 아니겠는가.
1,440m 만복대 산정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앞을 가로막던 구름이 확 걷히고 동녘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지리산 제1봉인 천왕봉과 제2봉인 반야봉 봉우리만 구름 속에 섬처럼 솟아 둥둥 떠 있는 풍경은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산이 아니라 망망대해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비현실적인 너무나 비현실적인 풍경 앞에 그만 목 놓아 울어버리고 싶은 심경이었다.
-「한바탕 울음 우는 풍경들」 중에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호곡장(好哭場)’,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란 글이 나온다. 중국 사신 길에 만난, 1,200리 사방이 하늘과 땅의 끝이 맞닿아 있는 요동 벌판의 풍경을 보고 ‘한바탕 울음을 울기에 좋은 곳’이라고 했다는데, 또 그만한 울음터로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는 자리와 황해도 장연의 금모래사장을 꼽았다고 한다. 시인이 오르는 지리산은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앞을 가로막던 구름이 확 걷히고 동녘 하늘이 붉게 물들”어 “반야봉 봉우리만 구름 속에 섬처럼 솟아 둥둥 떠 있는 풍경”에 누군가는 “그만 저 구름바다에 빠져 죽어도 좋아!”라고 외쳤다 하니 ‘한바탕 울음 울기 좋은 곳’이 분명하다.
매화 산수유 벚꽃 피어 전국에서 몰려든 상춘객으로 들끓던 섬진강 길이 오월이 되니 나뭇잎들이 푸르러져 시원한 그늘 터널이 만들어지고, 하동공원길에는 봉숭아 물들인 새끼손톱 같은 매실들이 꼬물꼬물 자랍니다.
-「강에서 짓는 농사」 중에서
때로는 한 장의 풍경이 삶을 살게 하고 눈물을 닦아주기도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빠르게 변화하고 경쟁하는 사회, 개인적 상처 등으로 지친 현대인들에게 이 책은 '풍경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과 살아 있음의 존재 가치를 느끼라'며 토닥여 준다. 책 속 풍경들은 시인이 엎드리고 걷고 품으며 찍은 사진으로 자신만의 기억과 눈빛으로 연결되며, 각자의 삶에서 뭉클하고 중요한 순간을 발견하게 한다.
“삼백예순 날 투병의 시간을 건너와 삼라만상 일깨우는” 지리산과 섬진강의 품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살이의 소중한 깨달음이 “뭇 생명 소중함의 깨달음으로, 그 깨달음이 만물 사랑의 손길로 번지기를” 기원하는 시인처럼 자연과 풍경을 사랑하는 사람, 마음의 위로와 회복이 필요한 사람, 조용히 삶을 돌아보고 싶은 이들에게 치료비를 한 푼도 받지 않는 주치의, 『나를 살린 풍경들』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