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가 가장 사랑하는 철학자
한병철은 어떻게 사유하며 무엇을 바라보는가
에로스의 날갯짓과 모순적 아름다움으로 치닫는
한병철의 사유가 마침내 도달한 희망의 정신
현존하는 철학자 가운데 한병철은 가장 많이 읽히는 철학자다. 첨예한 시선과 독창적 사유, 문학적 문체가 돋보이는 그의 책은 세계 수십 개의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고 독일과 한국은 물론,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왜 세계는 한병철에게 열광하는가. ‘진단과 명명의 철학자’ 한병철의 사유는 무엇으로부터 발화되는가. 그의 시선은 지금, 무엇을 직시하고 있는가. 《생각의 음조》는 한병철의 가장 고유한 목소리를 담아낸 유일한 책이다. 한병철의 사유의 유래와 음조와 지향, 그리고 그가 펴낸 숱한 책들을 관통하는 사유의 궤적까지 담아냈다. 피로사회와 불안사회 너머 희망의 정신을 향해, 지금 세계가 가장 사랑하는 철학자 한병철의 목소리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처럼 흐른다. 이 책은 곧 한병철이다.
‘한병철 콘퍼런스 트릴로지’
한병철의 목소리로 전하는 한병철 사유의 정점
재독 철학자 한병철과 스페인어권 최대 규모의 출판사 플라네타는 2024년부터 2026년까지 강연과 클래식 연주를 함께 진행한 후 텍스트, 사진, 영상을 책의 형태로 펴내는 특별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생각의 음조》는 ‘한병철 콘퍼런스 트릴로지’의 첫 책으로, 한병철의 가장 내밀한 고백과 사유의 정수를 담고 있다. 디플롯이 펴내는 한국어판은 한병철이 직접 집필한 독일어 원고를 저본으로 삼아 우리말로 옮긴 뒤, 다시 스페인어 출간본과 비교하며 문장 하나하나를 다듬었다. 이는 ‘한병철의 목소리’를 가장 온전하게 담아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한병철은 진단과 명명의 철학자다. 현대 사회의 시대적 상처를 진단하고 문제의 본질을 묘파한 후 정확한 이름을 붙인다. 이름은 현상 이면에서 은밀하고 공공연하게 존재하던 것들의 정체를 밝혀내고 맞서고 기억하게 만든다. 십여 년 전 출간된 《피로사회》는 전 세계에 놀라운 반향을 일으켰다. 현존하는 철학자 가운데 한병철은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읽히는, 가장 사랑받는 철학자다. 한편 그는 주로 독일에만 머물면서 연구와 집필에 전력하는 은둔의 철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자신의 대중강연이 인터넷 플랫폼에 게재되는 것에 줄곧 반대해왔던 그가 독일이 아닌 라이프치히, 리스본, 포르투에서 강연을 진행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한병철 콘퍼런스 트릴로지’로 펴낸다는 소식만으로도 큰 화제가 되었다.
“저에게는 두 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한병철의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 그 유래와 음조와 지향에 관하여
왜 세계는 이토록 한병철의 사유에 열광하는 것일까. 그의 언어는 어떻게 사람들을 매혹시키는가. 한병철은 이 책에서 자신의 사유가 발화되고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처음으로 고백한다.
“저에게는 두 개의 날개(Fl?gel)가 있습니다.”
“저는 그랜드피아노를 가지고 있다는 뜻에서만 이 단어를 쓰려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개의 날개, 즉 두 대의 그랜드피아노(dos pianos de cola)는 저에게 실제로 날 수 있게 하는 날개도 달아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두 날개, 즉 두 대의 그랜드피아노와 그 음악이 가져다주는 상상의 비행을 사랑합니다.”
“에로스의 날개와 날갯짓 없이 사유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사유하는 사람은 에로스의 날개를 통해 미지의 영역,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 앞으로 도래할 것, 즉 새로운 것을 향하여 날아오르기 때문입니다.”
_본문에서.
한병철은 음악을 매개로 자신의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두운 빛, 어두운 영롱함, 밝은 슬픔’과 같은 역설이 생각의 음조를 형성한다고 설명한다. 진실은 이러한 ‘모순적 아름다움’에서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의 책들이 너무 많이 반복한다고 불평하지만, 그는 자신의 책들이 반복이 아니라 변주곡에 가깝다고 말한다. 마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처럼, 멜로디는 변하지 않으면서 숱한 변주를 통해 멜로디는 명징해지고 밀도가 높아지며 아름다움이 깊어지는 것처럼. 한병철은 프리드리히 횔덜린, 베르톨트 브레히트, 롤랑 바르트, 로자 룩셈부르크, 페터 한트케, 가브리엘 단눈치오 등의 텍스트를 경유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사유의 음조와 글쓰기의 이상을 풀어낸다.
“저는 희망의 사람입니다.”
피로사회와 불안사회 너머, 마침내 도달한 희망의 정신에 관하여
2부와 3부는 지금껏 한병철이 펼쳐왔던 사유의 정수를 다시 한번 변주하되 마침내 그가 도달한 희망의 정신에 관해 이야기한다. 《피로사회》 《투명사회》 《에로스의 종말》 《타자의 추방》 《고통 없는 사회》 《정보의 지배》 《관조하는 삶》 《서사의 위기》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등 핵심 저작들을 비롯해 가장 최근에 출간한 《불안사회》(원서 제목은 《희망의 정신(Der Geist der Hoffnung)》)까지 아우르며 평생 천착해왔던 사유의 궤적을, 그리고 바로 지금 그를 사로잡고 있는 ‘희망의 정신’을 고도의 우아한 언어로 이야기한다.
현대인들은 접촉 부족 사회의 고립된 감방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세계와 접속한다. 우리는 세상을 손안에 쥐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기껏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향한 몰입도를 끌어올릴 뿐이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터치하며 세상을 나의 필요에 복종하게 만들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나’는 자기 안에서 고립되고 세계의 부재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타자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타자의 소멸을 초래한다. 타자가 소멸된 세상에서 우리는 우울 속으로 점점 더 침잠한다. 한병철은 단호한 목소리로 묻는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서로 접촉할 수 있느냐고, 사랑의 종말 앞에서 우리는 과연 사랑할 수 있는가를.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 접촉할 수 있을까요? 접촉할 능력이 있나요? 타자와의 접촉이 가능하긴 한가요? (…) 신체 접촉의 부족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유발하며, 접촉의 부재는 우울로 이어집니다. 저는 우리가 타자와의 접촉이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자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더욱더 우울해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타자의 부재’가 곧 우울의 원인입니다.” _본문에서.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고 한병철은 쓴 적이 있다. “짐승은 주인에게서 채찍을 빼앗아서 자기가 주인이 되기 위해 다시 자기 자신을 채찍질한다”고 카프카는 썼다. “우리는 각자 고유해지고 싶어 하는 복제인간”으로, “가축의 떼” “절대적 노예”로 전락한다.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는 끊임없는 자기 착취를 요구한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를 최적화하며 ‘나’의 자유의지로 자신을 착취한다. 성과사회는 필연적으로 불안사회로 이어진다. 우울이 감염병처럼 창궐하고 불안과 혐오가 곳곳에서 촉발한다. 불안은 권력과 체제의 도구로 사용되며 희망의 씨앗을 질식시킨다. 한병철은 바로 이 지점, “역사적 기로에서” 희망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리고 희망의 정신을 건져 올린다.
비평가들은 비관주의자라고 비난하지만, 한병철은 자신을 희망의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희망하는 사람만이 사유할 수 있다. 희망의 사람은 낙관주의자들과는 달리 세상의 비극과 삶의 부정적 측면, 그리고 예측 불가능성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구조에 의문을 제기하고 완전히 다른 삶의 형태를 열망하며 행동으로 옮긴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긍정성 숭배는 사회를 탈연대화하지만, 희망은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화해와 연대로 이끈다. 긍정성의 주체는 ‘나’이지만 희망의 주체는 ‘우리’다.
“희망한다는 것은 ‘희망을 확장’하고 ‘희망의 불꽃을 퍼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망은 혁명의 누룩, 새로운 것의 발효제, 즉 비타 노바(vita nova)의 시작점입니다. 불안의 혁명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불안은 모두를 복종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사람은 지배자에게 복종합니다. 다른 세상,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것만으로도 혁명의 잠재력이 자라납니다. 오늘날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면, 그것은 희망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불안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며, 살아남기의 삶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입니다.” _본문에서.
[편집자 레터]
지도로는 찾을 수 없는 곳
피로사회와 불안사회에서 한병철의 책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익을 쫓아 책을 만든다는 건, 한병철의 사유를 경유하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희망은 낙관주의가 아니다.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라 어떻게 되든 의미가 있다는 확신이다.”_본문에서). 모름지기 책의 역사가 그러했으며, 수십 년째 계속되는 ‘출판 불황’의 전설에도 불구하고 출판이 건재한 건 바로 책의 정신 때문이다.
한병철은 말한다. 비평가들은 자기더러 비관주의자라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은 희망하는 사람이라고. 불가능함과 부정성을 직시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하는 사람. 불안을 무기로 시민을 겁박하는 사회체제에 의문을 제기하며 완전히 다른 삶의 형태를 열망하는 사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 시도되지 않은 것, 태어나지 않은 것을 향해 손을 뻗는 사람. 도무지 장악되지 않는 타자를 긍정하며 혐오와 고립에 맞서는 사람. 사랑의 종말에 맞서 사랑을 재발명해내는 사람. 성공을 계산하지 않고 그저 하는 사람. 불안과 우울이 엄습할 때면 파울 첼란의 시를 곱씹으며 버텨내는 사람.
별은
여전히 빛난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_파울 첼란, 〈스트렛토(Engf?rung)〉 부분.
그러니까 나도 그런 사람이다. 출판을 시작한 지 이십 년 만에 다다른, 지도로는 찾을 수 없는 곳. 지금 여기에서 희망의 정신을 책으로 만든다. 한병철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금 더 용감해진다